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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콸레 파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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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스콸레 파올리는 코르시카 출신으로, 제노바 공화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노력한 인물이다. 그는 코르시카 왕국의 최고 지위에 올라 헌법을 제정하는 등 근대 국가 건설을 시도했으나, 프랑스의 침공으로 영국으로 망명했다. 프랑스 혁명 이후 코르시카로 돌아왔지만, 혁명에 대한 반감과 정치적 입장 차이로 인해 나폴레옹과 갈등을 겪었고, 결국 영국 통치를 받아들였다가 다시 추방당했다. 그는 런던에서 생을 마쳤으며, 그의 사상은 이탈리아 통일 운동과 미국 독립 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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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콸레 파올리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리처드 코스웨이의 초상화
개요
직책코르시카 장군
임기 시작1755년 11월 18일
임기 종료1769년 5월 9일
전임직책 신설
후임직책 폐지
출생일1725년 4월 6일
출생지모로사글리아, 코르시카, 제노바 공화국
사망일1807년 2월 5일
사망지런던, 잉글랜드
안장지모로사글리아, 코르시카
이름
이탈리아어Filippo Antonio Pasquale di Paoli (필리포 안토니오 파스콸레 디 파올리)
코르시카어Pasquale (파스콸레), Pasquali Paoli (파스콸리 파올리)
프랑스어Philippe-Antoine-Pascal Paoli (필리프-앙투안-파스칼 파올리)

2. 생애

모로사리아 출신인 파스콸레 파올리는 1739년 아버지 지아친토 파올리와 함께 나폴리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교육을 받고 군 경력을 시작했다. 코르시카 지도자 중 한 명이었던 가폴리의 암살 소식을 듣고 귀국을 결심, 1755년 코르시카로 돌아와 최고 지도자인 '장군'(Generale della Nazione|제네랄레 델라 나치오네ita)이 되었다. 그는 헌법을 발포하는 등 근대 국가로서 코르시카를 정비하고자 했으나, 1768년 제노바 공화국으로부터 코르시카의 영유권을 넘겨받은 프랑스가 침공하였다. 1769년 폰테 누보 전투에서 패배한 파올리는 영국으로 망명했다.

프랑스 혁명 이후 프랑스 정부의 허가를 받아 코르시카로 돌아왔다. 파올리는 코르시카의 독립을 염원했지만, 군주제를 지지하며 루이 16세를 처형한 프랑스 혁명에는 반감을 가졌다. 처음에는 파올리를 영웅으로 숭배했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는 혁명에 대한 입장 차이로 점차 관계가 멀어졌다. 파올리는 포초 디 보르고 등과 함께 영국과의 연계를 모색하며 파올리 파를 형성했고, 이로 인해 1793년 프랑스 국민 공회로부터 체포 명령을 받았다. 이후 파올리 파는 보나파르트 가문을 코르시카에서 추방했다.

1794년 파올리는 영국의 통치를 받아들여 앵글로-코르시카 왕국을 세웠으나, 영국 부왕 길버트 엘리엇과의 갈등 끝에 1795년 다시 영국으로 망명해야 했다. 1796년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코르시카를 재점령했으며, 파올리는 망명지 런던에서 이 소식을 들었다. 그는 1807년 런던에서 사망했고, 1889년 유해는 고향 모로사리아로 돌아와 안장되었다.

2. 1. 초기 생애

파스콸레 파올리는 코르시카 섬 오트코르스 모로살리아 코뮌의 스트레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지아친토 파올리는 의사이자 애국자로, 당시 부패하고 폭압적으로 여겨지던 제노바 공화국의 지배에 맞서 싸운 코르시카 민족주의 운동의 지도자 세 명 중 한 명이었다. 이전 세기까지 코르시카인들은 제노바의 지배를 비교적 수용했으나, 1729년 첫 반란이 일어날 무렵에는 제노바의 통치가 실패했다는 인식이 퍼져 있었다. 주요 문제로는 피의 복수 관습으로 인한 높은 살인율, 바르바리 해적의 해안 마을 약탈, 과도한 세금, 경제 불황 등이 있었다.

1729년, 새로운 세금 부과를 계기로 반란이 일어나자 제노바인들은 요새로 후퇴하며 외국의 개입을 요청했다. 처음에는 합스부르크 신성 로마 제국에, 이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서 적으로 맞섰던 부르봉 프랑스에 도움을 청했다. 전문 군대에 패배한 코르시카인들은 무력 저항을 포기했지만 조직은 유지했다. 1739년 프랑스에 항복한 후, 지아친토 파올리는 당시 14세였던 아들 파스콸레와 함께 나폴리로 망명길에 올랐다. 파스콸레의 형 클레멘테는 혁명 의회와의 연락을 위해 코르시카에 남았다.

코르시카는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의 여파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고, 여러 국가의 군대가 섬의 도시들을 일시적으로 점령하기도 했다. 나폴리에서 지아친토는 아들의 재능을 알아보고 고전 교육에 힘썼다. 파스콸레는 계몽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았으며, 이는 예술, 건축, 정서 면에서 신고전주의로 나타났다. 길에서 한 노인이 베르길리우스를 낭송하는 것을 듣고, 파올리가 다가가 등을 두드리며 노인이 멈춘 부분부터 이어서 낭송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4] 1741년, 파스콸레는 나폴리 왕립 군대의 코르시카 연대에 입대하여 아버지와 함께 칼라브리아에서 복무하며 군 경력을 시작했다.

2. 2. 코르시카 독립 운동

코르시카 공화국(1755–1769)의 국기


모로사리아 출신인 파스콸레 파올리는 1739년 아버지와 함께 나폴리로 망명했다. 1745년 나폴리 대학에서 공부하고 시칠리아 왕국 군인으로 복무하던 중, 가폴리의 암살 소식을 듣고 코르시카로 돌아갈 결심을 굳혔다.

1755년 코르시카로 돌아온 파올리는 평의회의 결정에 따라 코르시카의 최고 지도자인 '장군'(Generale della Nazione|제네랄레 델라 나치오네it) 지위에 올랐다. 같은 해 11월, 코르시카인들은 제노바 공화국으로부터 독립된 주권 국가임을 선언하는 헌법을 비준했다. 이 헌법은 계몽주의 원칙에 따라 작성된 최초의 헌법으로 평가받는다.[9] 파올리는 피에비(pievi, 교구를 묶은 68개의 고대 행정 구역) 대표자들에 의해 경쟁 후보였던 엠마누엘 마트라(Emmanuel Matra)를 누르고 국가 원수로 선출되었다. 비록 선출 당시에는 68개 중 16개 피에비 대표만 참여했지만[7], 그는 대통령이자 헌법 제정자로서 현대적인 국가 건설에 힘썼다. 대표적인 예로 코르테에 대학을 설립한 것을 들 수 있다.[8]

그러나 코르시카에 대한 통제력을 사실상 잃어버린 제노바 공화국은 섬 방어에 따른 부채를 프랑스에 상환하기 위해 1768년 5월 베르사유 조약을 통해 코르시카의 통치권을 프랑스에 넘겨주었다.[10] 1768년 9월부터 프랑스는 코르시카 정복에 나섰다.[10] 파올리는 산악 지대에서 게릴라전을 벌이며 저항했지만, 1769년 폰테 누보 전투에서 압도적인 프랑스군 병력에 패배하고 결국 영국으로 망명길에 올랐다. 이후 코르시카는 1789년 공식적으로 프랑스령이 되었다.

2. 3. 코르시카 공화국 수립과 개혁



1755년 11월, 코르시카 인들은 코르시카를 제노바 공화국으로부터 독립된 주권 국가로 선포하는 헌법을 비준했다. 이 헌법은 계몽주의 원칙에 따라 작성된 최초의 헌법으로 평가받는다. 새로운 국가의 원수로는 파올리가 피에비(pievi, 여러 교구를 묶은 고대 행정 구역) 대표자들에 의해 선출되었다. 비록 당시 68개 피에비 중 16개 대표만 참여했지만, 그는 경쟁 후보였던 엠마누엘 마트라를 제치고 지도자가 되었다.[7] 대통령이자 헌법의 저자인 파올리는 현대적인 국가를 건설하는 데 힘썼으며, 그 예로 코르테에 대학교를 설립했다.[8] 역사가 린다 콜리는 파올리가 국가의 최초 성문 헌법을 작성했다고 평가한다.[9]

2. 4. 프랑스의 침공과 첫 번째 망명

제노바 공화국은 코르시카에 대한 통제력을 사실상 잃게 되자, 섬 방어 과정에서 발생한 부채를 프랑스에 상환할 유일한 방법으로 1768년 5월 베르사유 조약을 통해 코르시카를 프랑스에 넘겨주었다.[10] 같은 해 9월, 프랑스는 코르시카를 완전히 정복하기 위한 군사 작전을 시작했다.[10] 파스콸레 파올리는 산악 지대에서 게릴라전을 벌이며 프랑스군에 맞서 싸웠으나, 1769년 폰테 누보 전투에서 수적으로 우세한 프랑스군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결국 파올리는 영국으로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이후 코르시카는 1789년 공식적으로 프랑스령으로 편입되었다.

2. 5. 런던 망명과 프랑스 혁명

프랑스 혁명 당시 파올리의 이름은 자유와 민주주의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1790년, 파리의 국민 제헌 의회는 코르시카를 프랑스 영토로 공식 편입하는 법령을 통과시키는 한편, 망명자들에 대한 사면을 허용했다. 이에 파올리는 즉시 코르시카로 돌아왔고, 오레차에서 열린 도(Department) 임원 선거에서 만장일치로 대통령에 선출되었다.[12] 당시 선거를 조직했던 젊은 자코뱅파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역시 파올리를 존경하는 인물 중 하나였다.

나폴레옹은 옥손의 포병 연대에서 휴가 중 코르시카 역사를 집필하며 파올리에게 편지를 보내 조언과 역사 자료를 요청했다. 그러나 파올리는 나폴레옹의 글이 미숙하고 지나치게 감정적이라며 자료 제공을 거절했고, 이 과정에서 두 사람의 입장 차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파올리는 영국과의 관계나 군주제에 대한 자신의 온건한 입장을 드러내지 않았기에, 나폴레옹은 이를 알지 못했다.[13]

파올리는 루이 16세 처형 사건을 계기로 프랑스 혁명과 완전히 결별하고 왕당파와 연대했다. 그는 이러한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으나, 프랑스 혁명 정부가 사르데냐 점령을 명령했을 때 조카에게 비밀 지령을 내려 작전을 실패하도록 유도했다. 이는 사실상 영국의 대리인으로서 행동한 것이었는데, 영국은 프랑스의 사르데냐 점령을 경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14]

한편, 파올리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코르시카 경비대 대령으로 임명하여 1793년 2월 라 마달레나 섬 공격에 참여시켰다. 그러나 이 공격은 사령관 피에트로 파올로 콜로나-체사리의 미숙한 지휘와 사전 정보 유출 등으로 실패로 돌아갔다. 작전 실패 후, 한때 파올리를 숭배했던 나폴레옹은 격분하여 보나파르트 가문과 함께 프랑스 국민 공회에 파올리를 반역자로 비난했다. 이에 국민 공회는 파올리에 대한 체포 영장을 발부하고 군대를 파견했다. 그러나 파올리를 지지하는 세력과 왕당파가 연합하여, 아작시오에서의 소란 이후 파올리파 의회는 보나파르트 가문을 섬에서 추방했다.

1793년, 파올리는 코르테에서 '콘술타'(의회)를 소집하여 자신을 대통령으로 선출하고 프랑스로부터의 공식적인 분리독립을 선언했다. 이후 그는 혁명 프랑스와 전쟁 중이던 영국 정부에 보호를 요청하게 된다.

2. 6. 영국-코르시카 왕국과 두 번째 망명

프랑스 혁명 당시 루이 16세의 처형 문제로 혁명 정부와 결별한 파올리는 왕당파와 손을 잡았다. 그는 혁명 정부가 사르데냐 점령을 명령했을 때, 조카에게 비밀 지령을 내려 전투에서 패배하도록 만들었다. 이는 프랑스의 사르데냐 점령을 원치 않던 영국의 이해관계에 부합하는 행동이었다.[14]

한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코르시카 경비대의 대령으로 1793년 2월 라 마달레나 섬 공격에 참여했다. 그러나 사령관 피에트로 파올로 콜로나-체사리의 미숙한 지휘와 사전 정보 유출 등으로 공격은 실패했다. 나폴레옹은 이 실패의 책임을 파올리에게 돌렸고, 한때 파올리의 강력한 지지자였던 그는 프랑스 국민 공회 앞에서 파올리를 반역자로 고발했다. 체포 영장이 발부되고 프랑스 군대가 코르시카로 파견되었으나, 파올리를 지지하는 세력과 왕당파는 연합하여 보나파르트 일가를 섬에서 몰아냈다.

파올리는 1793년 코르테에서 '콘술타'(의회)를 소집하여 자신을 대통령으로 선출하고, 공식적으로 프랑스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다. 그는 혁명 프랑스와 전쟁 중이던 영국 정부에 보호를 요청했고, 1794년 새뮤얼 후드 제독이 이끄는 영국 함대가 코르시카에 도착했다.

짧은 기간 동안 코르시카는 영국의 보호 아래 놓였고, 조지 3세를 국가 원수로 하는 영국-코르시카 왕국이 수립되었다. 이는 코르시카가 대영 제국에 편입된 것은 아니었으나, 파올리 정부와 영국 사이의 관계는 명확히 정립되지 않아 많은 권한 충돌이 발생했다. 특히 영국이 파견한 부왕 길버트 엘리엇과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결국 영국 측은 파올리에게 사임을 요구했고, 다른 선택지가 없던 파올리는 1795년 10월 연금을 받는 조건으로 다시 영국으로 망명길에 올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1796년,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코르시카를 재점령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런던)에 있는 파스콸레 파올리의 현충비


파올리는 1795년 10월 영국으로 건너가 남은 생애를 보냈다. 그는 1807년 2월 5일 런던에서 사망하여 올드 세인트 판크라스 교회 묘지에 묻혔다. 그의 이름은 1879년 버뎃-쿠츠 기념 해시계에 중요한 인물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에는 그의 흉상이 세워졌으며, 1889년 그의 유해는 영국 군함에 실려 고향 모로사리아로 옮겨져 안장되었다.[15]

2. 7. 런던에서의 죽음과 유산



파올리는 1795년 10월 영국으로 건너가 남은 생애를 보냈다. 그는 1807년 2월 5일 런던에서 사망했으며, 올드 세인트 판크라스 교회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의 이름은 1879년 버뎃-쿠츠 기념 해시계에 중요한 인물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에는 그의 업적을 기리는 흉상이 세워졌다. 1889년, 그의 유해는 영국 군함에 실려 코르시카로 돌아왔으며, 고향인 모로살리아의 교회에 안치되었다.[15]

3. 사상과 영향

파스콸레 파올리는 코르시카의 독립 운동을 이끈 지도자이자 계몽주의 사상가로서, 그의 사상과 활동은 동시대 유럽뿐만 아니라 아메리카 대륙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코르시카의 독립과 공화정 수립을 위해 헌신했으며, 이 과정에서 계몽주의 이념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실천하고자 했다. 영국 망명 시기에는 존슨 서클과 같은 지식인 그룹과 교류하며 사상적 기반을 다졌고, 이는 그의 정치적 결정과 코르시카 통치 방식에 반영되었다.

파올리는 코르시카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강하게 내세우면서도, 이탈리아 문화와 언어에 대한 깊은 유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코르시카어를 이탈리아어족 언어의 일부로 여겼으며, 자신이 세운 코르시카 공화국에서 이탈리아어를 공식 언어로 채택하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활동은 후대에 이탈리아 통일주의 운동의 선구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배경이 되었다.

또한, 파올리의 코르시카 독립 투쟁과 공화주의적 이상은 바다 건너 미국 독립 혁명에도 영향을 주었다. 자유의 아들들과 같은 미국의 독립 운동가들은 파올리의 활동에서 큰 영감을 받았으며, 그의 이름은 미국 여러 지역의 지명으로 남아 오늘날까지 기념되고 있다. 이처럼 파올리의 사상과 영향력은 코르시카라는 섬에 국한되지 않고, 당대의 자유주의공화주의 운동에 중요한 족적을 남겼다.

3. 1. 계몽주의 사상

런던으로 망명한 파올리는 곧 존슨 서클(Johnsonian)의 주목을 받았다. 이 모임은 파올리가 합류할 무렵 성공한 자유주의 성향의 인사들이 주축이 된 더 클럽(The Club)으로 발전해 있었다. 파올리는 방문객들에게 총알 자국이 난 자신의 코트를 보여주며 관람료를 받기도 했는데, 이는 초기 회원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일화로 제임스 보스웰에 의해 기록되었다.[11] 보스웰은 그의 저서 ''코르시카 기행(An Account of Corsica)''에서 파올리의 회고를 다루었다.[11]

파올리는 조지 3세 국왕과 여러 차례 만난 후, 코르시카에서 권력을 되찾을 경우 프랑스에 맞서 영국의 이익을 지지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영국 왕실로부터 연금을 받게 되었다. 이는 단순한 정치적 거래가 아니었으며, 파올리는 진심으로 영국에 우호적인 입장을 갖게 되었고 국왕을 비롯한 새로운 영국 친구들에게 애정을 느꼈다. 이러한 관계는 훗날 프랑스 혁명 발발 시 그가 프랑스의 왕당파를 지지하는 배경이 되었다. 다만 이 약속은 구체적인 조약 형태는 아니었으며, 당시 상황에서 미래를 예측하기는 어려웠다.

파올리는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의 처형을 계기로 프랑스 혁명과 완전히 결별하고 왕당파와 연대했다. 그는 이러한 입장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혁명 정부가 사르데냐 점령을 명령했을 때 조카에게 비밀 지령을 내려 작전을 실패하도록 유도했다. 이는 사르데냐에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던 영국의 입장을 대변한 행동으로 해석될 수 있다.[14]

한편, 파올리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코르시카 경비대 대령으로 임명하여 1793년 2월 라 마달레나 섬 공격에 참여시켰다. 이 공격은 사령관 피에트로 파올로 콜로나-체사리의 미숙한 지휘, 사전 정보 유출 등으로 인해 실패로 돌아갔다. 나폴레옹은 상황을 파악하고 실질적인 지휘권을 행사하려 했으나 공격 실패를 막지 못하고 간신히 탈출했다. 과거 파올리의 강력한 지지자였던 나폴레옹은 이 사건 이후 파올리에게 등을 돌렸고, 보나파르트 가문 전체와 함께 프랑스 국민 공회에 파올리를 반역자로 고발했다. 체포 영장이 발부되고 프랑스 군대가 코르시카로 파견되자, 파올리를 지지하는 세력과 왕당파는 연합하여 보나파르트 가문을 섬에서 몰아냈다.

1793년, 파올리는 코르테에서 의회(''Consulata'')를 소집하여 자신을 대통령으로 선출하고 프랑스로부터의 공식적인 분리를 선언했다. 그는 혁명 프랑스와 전쟁 중이던 영국 정부에 보호를 요청했다. 1794년, 새뮤얼 후드 제독이 이끄는 영국 함대가 코르시카에 도착했다. 이는 나폴레옹의 활약으로 프랑스 혁명군이 툴롱 항구를 탈환한 직후의 일이었다.

영국의 지원과 파올리의 협력으로 코르시카는 잠시 조지 3세를 국가 원수로 하는 영국-코르시카 왕국이라는 이름의 영국 보호령이 되었다. 그러나 이는 코르시카가 대영 제국에 편입된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으며, 파올리 정부와 영국 간의 권한 문제가 지속적으로 발생했다. 결국 영국 왕실은 파올리에게 사임을 요구했고, 다른 선택지가 없었던 그는 연금을 받고 다시 영국으로 망명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프랑스가 코르시카를 재점령하면서 20세기까지 코르시카의 주권 문제는 일단락되었다.

3. 2. 이탈리아 통일 운동

이탈리아 통일주의가 하나의 정치적 또는 역사적 운동으로 자리 잡기 훨씬 이전에 활동했던 파스콸레 파올리는 그 운동의 직접적인 참여자는 아니었다.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중 1942년 말 이탈리아 파시스트 군대에 의한 코르시카의 이탈리아 점령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러나 파올리가 이탈리아 문화에 깊이 공감하고 자신의 모국어인 코르시카어를 이탈리아어족 언어의 일부, 특히 이탈리아어와 가까운 방언으로 여겼다는 점은 분명하다. 코르시카어는 토스카나어, 시칠리아어, 그리고 어느 정도 사르데냐어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언어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그의 서한집(Lettere)을 엮은 니콜로 토마세오는 파올리를 이탈리아 통일주의의 선구자 중 한 명으로 평가했다.

코르시카 일 루스에 있는 파스콸레 파올리 기념비: 코르시카 영웅은 1755년 코르시카 공화국의 공식 언어를 이탈리아어로 만들었다.


코르시카인들이 파올리를 부르는 별명인 '조국의 아버지'라는 뜻의 Babu di a Patria|바부 디 아 파트리아co는 그의 민족적 정체성과 리더십을 잘 보여준다. 그는 1768년 프랑스 침략자들에게 보낸 서한에서 코르시카인의 이탈리아적 정체성과 연대 의식을 강하게 드러냈다.[17]

우리는 출생과 감정으로 코르시카인이지만, 무엇보다도 언어, 기원, 관습, 전통으로 이탈리아인이라고 느낍니다. 그리고 이탈리아인들은 역사와 신 앞에서 모두 형제이며 단결되어 있습니다... 코르시카인으로서 우리는 노예도 "반역자"도 되기를 원하지 않으며, 이탈리아인으로서 우리는 다른 이탈리아 형제들과 동등하게 대우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자유롭거나 아무것도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이기거나 손에 무기를 들고 죽을 것입니다(프랑스에 맞서)... 프랑스와의 전쟁은 하나님의 이름이 신성하고 정당한 것처럼 정당하고 신성하며, 여기 우리 산에서 이탈리아를 위해 자유의 태양이 뜰 것입니다....
''Siamo còrsi per nascita e sentimento ma prima di tutto ci sentiamo italiani per lingua, origini, costumi, tradizioni e gli italiani sono tutti fratelli e solidali di fronte alla storia e di fronte a Dio… Come còrsi non-vogliamo essere né schiavi né "ribelli" e come italiani abbiamo il diritto di trattare da pari con gli altri fratelli d'Italia… O saremo liberi o non saremo niente… O vinceremo con l'onore o soccomberemo (contro i francesi) con le armi in mano... La guerra con la Francia è giusta e santa come santo e giusto è il nome di Dio, e qui sui nostri monti spunterà per l'Italia il sole della libertà…''


파올리는 이러한 신념을 바탕으로 이탈리아어를 자신이 세운 코르시카 공화국의 공식 언어로 만들고자 했다. 실제로 1755년에 제정된 코르시카 헌법은 이탈리아어로 작성되었으며, 1765년 코르테에 설립했던 단명한 대학에서도 이탈리아어를 교육 언어로 사용했다.

3. 3. 미국 독립 운동에 대한 영향

미국의 자유의 아들들(Sons of Liberty) 운동은 파올리에게서 영감을 받았다. 자유의 아들들의 지도자인 에베네저 매킨토시(Ebenezer Mackintosh)는 그의 아들의 이름을 파스칼 파올리 매킨토시(Paschal Paoli McIntosh)라고 지어 그를 기렸다. 1768년, ''뉴욕 저널''(New York Journal)의 편집자는 파올리를 "''지구상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고 묘사했다. 미국 내 여러 지역이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여기에는 다음이 포함된다.

  • 파올리 (콜로라도)(Paoli, Colorado)
  • 파올리 (인디애나)(Paoli, Indiana)
  • 파올리 (켄터키)(Paoli, Kentucky)
  • 파올리 (오클라호마)(Paoli, Oklahoma)
  • 파올리 (펜실베이니아)(Paoli, Pennsylvania), 이곳은 자유의 아들들(Sons of Liberty)의 회합 장소이자 "코르시카 장군"에게 경의를 표하는 "파올리 장군의 선술집"(General Paoli's Tavern)에서 이름을 따왔다.
  • 파올리 (위스콘신)(Paoli, Wisconsin)

참조

[1] 뉴스 La vraie grandeur de Pascal Paoli https://www.lemonde.[...] 2002-05-31
[2] 서적 Journal of a Landscape Painter in Corsica Robert John Bush
[3] 서적 Napoleon, A Life Penguin Books
[4] 서적 Corsica: Picturesque, Historical, and Social: with a Sketch of the Early Life of Napoleon and an account of the Bonaparte, Paoli, Pozzo di Borgo, and other principal families https://archive.org/[...] Parry & M'Millan
[5] 서적 Biographical Essays, 1790–1890 Ayer Publishing
[6] 서적 Traditions of War: Occupation, Resistance, and the Law Oxford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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